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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군대 이야기

군대 이야기 7. 옥수수밭

by 오후식 2026. 3. 16.

 
 

 
한 번은 관측하던 북한 진영의 땅이 황금빛으로 물든 적이 있다. 황금빛은 옥수수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북한에서는 DMZ 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다. 흰옷을 입은 민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DMZ 안으로 드나들면서 농사를 짓는데 어느 날은 폭음이 들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곳 주변에 모여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차 한 대가 그곳으로 진입했다. 아마도 DMZ에 있는 지뢰를 누군가 밟았던 것 같았다.
 
별 생각이 없던 나는 그 폭음 이후로 DMZ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폭음이 터진 그날 저녁 북한에도 행복은 존재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인생이 폭음으로만 가득찬 것도 아닐텐데 혼자 연민에 차서 이런 생각을 한 게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 그 사건은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행복의 존재를 생각하기 위해 행복 자체에 대해 먼저 생각해봤는데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행복처럼 추상적인 표현이란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추상(抽象)은 '모습을 뽑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어떤 언어의 모습을 뽑아내고 그려낸다 정도로 이해했다. 당시에 생각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구체적인 표현만큼이나 추상적인 표현이 꽤 많다는 것이었다.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정의되는 건 오히려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형용사는 추상적이고 심지어 직업도 추상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판사라는 하나의 단어로 정의되지만 판사로 일하는 사람의 모습은 한 가지가 아니기에 판사에 대한 모습은 여러 개가 그려질 수 있다. 심지어 엄마, 아빠라는 단어도 생물학적 정의를 벗어나면 추상적 표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내 감정은 거의 이 추상성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추상적인 언어에서 내가 어떤 모습을 뽑고 그려내느냐에 따라 내가 처한 상황이 달라지고 내 생각 또한 달라지는 것 같았다. '행복'이라는 단어에서 어떤 모습을 뽑아내느냐, '부부'라는 단어에서 어떤 모습을 그려내느냐에 따라 내 감정이 결정될 수 있고 삶의 행동양식이 결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북한에도 당연히 행복은 존재할 거 같았다. 내가 뽑아 그린 행복과는 그 모습이 좀 다를 수는 있어도 말이다.
 
당시에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꽤나 중요한 생각처럼 느껴진다. 다만 그 중요한 생각을 너무 오랫동안 묻고 살아온 게 후회된다. 지금부터라도 언어의 모습을 뽑아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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