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나의 아버지
새벽 전화
2025년 2월 6일 새벽 6시 휴대 전화가 울렸습니다. 전화를 받으려고 폰 화면을 봤을 때 이미 19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습니다.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겼구나라는 걸. 전화를 받으니 어머니는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저에게 말을 했습니다.
"아빠가 응급실로 갔어.. 근데 응급실 의사 선생님이 아빠가 뇌출혈인데 출혈량이 너무 많데.. 오늘 내일 하실 거라네.. 어떡해"
뇌출혈로 의식을 잃은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저는 가족들과 중환자실에서 10분 정도의 면회 허가를 받고 누워 계신 아버지를 마주했습니다. 아버지는 산소 호흡기로 간신히 숨을 쉬고 계셨고 눈은 감고 계셨습니다. 저희는 아버지에게 하지 못한 말을 여러 번이고 말했습니다.
"아빠 사랑해. 아빠는 멋있는 사람이야. 아빠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
임종 면회는 아니었지만 가족들은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살아돌아오길 힘들다는 걸. 그리고 아버지는 2025년 2월 6일 밤 11시 56분에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사인은 뇌내출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숙직기사
아버지는 '천포창'이라는 자가면역 질환을 약 10년 정도 앓았습니다. 천포창은 피부와 점막에 수포가 올라오는 만성 면역 질환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온몸에 수포가 생기고 피부가 쉽게 벗겨져서 온몸이 화상입은 것과 같습니다. 아프면 누워서 쉬기라도 해야 하는데, 누우면 벗겨진 피부가 쓸려서 그러지도 못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몸으로 초등학교 숙직기사로 6년을 일하며 사셨습니다. 오후에는 학교로 출근해 학교 순찰 업무를 하고 학교에서 잠을 주무시고 오전에 일어나 학교 교문을 열고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가서 아침과 점심을 드셨습니다. 가족들과 아예 떨어져 산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약 6년 동안 가족들과 같이 주무시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몸이 좋지 않으신데도 직장생활을 하신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학교 일을 하기 전에 사업을 하셨습니다. '진공 증착 도금'이라는 기술로 공장을 운영 해서 자동차 부품, 문구 제품에 도금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아버지 사업은 오랫동안 어려웠습니다. 공장 운영에 대해 어떤 부분이 문제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버지 공장 일을 도우면서 어렴풋이 느낀 건 공장 수율도 좋지 않았고 중국에서 대규모로 도금을 하다 보니 운영에 타격이 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십수년을 공장을 적자로 운영하며 빚이 꽤 쌓였고, 그런 아버지에게 찾아온 기회가 바로 '초등학교 숙직 기사 업무' 였습니다.
숙직 기사 업무를 아버지는 참 좋아하셨습니다. 아마도 공장 운영을 혼자 하셨기 때문에 아버지는 외로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장에는 소소한 대화를 할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공장 운영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 나눌 곳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공장에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으셨나 봅니다. 반면 초등학교에서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선생님, 행정실 직원, 급식실 직원, 초등학생 아이들, 학교 체육관을 사용하는 배드민턴 클럽 회원들, 맞은 편 학교의 또 다른 숙직기사 아저씨. 아버지는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사람과 교류하는 행복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꽃을 사랑한 남자
아버지는 꽃을 참 좋아했습니다. 가끔은 제 책상에 조그만 꽃 화분을 놓고 가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숙직기사로 일하는 동안 학교에 허락을 받고 학교 뒷 마당에 조그만 텃밭을 가꾸셨습니다. 꽃과 나무를 심으셨고, 호박, 상추, 토마토, 옥수수 같은 채소도 심으셨습니다. 꽃이 피면 저에게 전화를 걸어 "꽃 피었으니까 와서 보고 가. 이쁘다" 라고 항상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학교 직원분들에게 들으니 직원분들에게도 그렇게 텃밭 보여주기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쑥스러워하며 자랑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하얀 국화와 향초가 놓인 아버지 빈소에서 제 친구들이 무엇을 놓을지 머뭇거릴 때, 꽃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 꽃 많이 좋아하셨어. 괜찮으면 꽃 하나 올려 드려줘."
빚과 아들
아버지는 몸이 아프셨지만 학교 숙직기사 일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셨습니다. 학교에서 일하는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으셨고, 또 사업하며 아버지 앞에 놓인 빚을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어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인 저를 낳으셨을 때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딸 낳았을 때는 돈을 많이 벌면 사위 좋은 일 하는 것 같았는데, 아들은 내가 부자가 되면 온전히 아들에게 좋은 일 하는 거 같아. 그래서 돈 많이 벌고 싶어."
이 말을 어머니에게 들었을 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직장인이 되고 나서 아버지에게 여러 번이고 남은 빚이 얼마냐, 나 이제 돈 벌어서 금방 갚아줄 수 있다고 말해도 아버지는 좀처럼 빚에 대해 말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부자가 되서 저에게 부를 물려주고 싶었던 아버지인데, 당연히 아들에게 빚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대학생 때 아버지 사업은 더욱 안좋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루는 집에 있는데, 아버지에게 같은 발신번호로 계속 전화가 왔습니다. 천포창으로 몸이 아파 불편히 앉아있던 아버지는 '알겠다'라는 말만 계속 반복하고 끊으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말했습니다. 걱정이 됐던 저는 아버지 전화기를 몰래 가져가 문자 내역을 살펴보았습니다. 빚쟁이로부터 온 연락이었습니다. 빚은 30만원 정도였고 저는 빚쟁이에게 전화를 걸어 계좌번호 보내면 바로 보내주겠다고, 그리고 다시는 아버지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크지 않은 돈을 갚지 못한 걸 보면 그 당시 아버지는 많이 힘드셨던 거 같습니다. 저는 빚을 대신 갚았다고 아버지에게 말했지만 아버지는 별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는 아버지의 그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결혼할 여자친구와 함께 설날에 부모님 집을 찾아갔습니다. 같이 인사 드리고 식사를 하고 과일을 먹고 있는데, 아버지가 지난 번에 맡겨 놓았던 돈을 다음주에 보내줄 수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처럼 저희 아버지도 돈 모으는 방법을 잘 모르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현금과 통장을 들고 가서 ATM 기기로 입금을 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저에게 달마다 돈을 보내 놓을테니 대신 돈을 좀 모아 놓아달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줄 수 있는데, 왜? 어디 갑자기 필요한거야?"라고 제가 묻자 아버지는 신용보증기금에서 빌린 돈이 좀 남았는데 빨리 갚아버리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돈을 갚았을 때 아버지는 상당히 뿌듯해 하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들인 저를 더 이상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신 거 같습니다.
베스트 프렌드
아버지 친구분 중에는 금은방을 운영하는 아저씨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왼손 약지에 은반지를 끼고 계셨습니다.
나: "이게 무슨 반지야? 어디서 났어?"
아버지: "(수줍게) 그냥 금은방 아저씨가 공짜로 줬어."
나: "왼손 약지면 엄마도 같이 낀거야?"
아버지: "응.. 그치"
35년 결혼 생활 동안 결혼 반지 낀 걸 본적이 없는 저에게 어머니가 끼자고 한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반지를 스스로 끼고 그걸 어머니한테도 끼워주셨다는 게 충격이기도 했지만, 그런 아버지가 사랑스러웠습니다.
장례식장에서 금은방 아저씨는 아버지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금은방 아저씨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아버지를 위한 말을 정말 많이 해주셨습니다.
"(무언가 묻어 있는 옷을 입은 아버지에게) 옷 깔끔하게 입어. 나이들수록 옷 깔끔하게 입어야 남들이 무시 안 해!"
"(선거에 출마하려는 아버지에게) 그런 거 뭐하러 해. 선거 비용에 돈 낭비하지 말고, 본인한테 더 좋은 데 써!"
" 아내한테 잘해! 이렇게 아픈 몸 잘 치료 해주고 옆에서 잘 챙겨주는 사람 없어!"
제가 알기로 저희 아버지는 남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기도 하고, '~~해!' 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시장에서 떡이나, 순대 같은 걸 사들고 금은방에 찾아가 아저씨와 점심을 같이 드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금은방 친구분이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던 거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저런 친구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마음이 조금 편했습니다. 힘든 순간에 가족들에게 말은 못했어도, 금은방에 가서 친구와 고민을 나누고 조금이라도 웃는 시간을 가졌다는 생각에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동반자, 아내
아버지는 건강 악화로 돌아가시기 전 약 한 달 동안 휴직하셨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일 때문에 집에 잘 안계셨고 어머니도 맞벌이 직장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두 분이 같이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퇴직하고 찾아온 그 한 달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매일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보시고 차려주셨습니다.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매일 정성스레 벗겨진 피부에 연고도 바르고 드레싱도 해주셨습니다. 잠이 들 때는 아버지 손을 꼭 붙잡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해주셨고, 풍족하지는 않아도 둘이 자식들 잘 키웠다고, 고생 많았다고 아버지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버지도 그런 어머니에게 '고생 했어. 나도 사랑해' 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두 분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한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 한 달 동안 두 분은 그렇게 지내셨습니다. 아버지라는 사람 옆에 어머니라는 인생의 동반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그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 부모님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언을 대신한 당부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는 저에게 유언장을 남기지는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버지는 살아 계신 동안 저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남기셨습니다.
"돈 너무 아끼지 말고 친구들이나 주변에 써야할 때는 꼭 써라."
"착하게 살아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들은 착한 사람을 반드시 기억한다."
저는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이 말을 사실 단순히 ‘좋은 말'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온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저에게 여러 번 말했는지를.
저의 친할머니는 아버지가 고등학생이던 때 돌아가셨습니다. 친할머니를 만나본적 없는 저에게 아버지는 친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간혹 들려주셨습니다.
"예전에 할머니는 시골에 살 때, 동네 거지들한테 밥도 주고 집에서 잠도 재워주셨어. 그리고 서울로 이사오고 나서 할머니가 돌아가셨지.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집 앞에 어떤 젊은 남자들이 찾아온거야. 누구냐고 물었더니, 전에 우리 할머니한테 밥도 얻어먹고 잠도 얻어 잤던 사람이라고 말하더라. 어머니 부고 소식 듣고 찾아왔다고 말이야."
아버지는 그때 그 청년들을 보면서 다른 건 몰라도 착하게 살고 베풀며 살아야 겠다고 결심하신 거 같습니다. 사람들한테 기억되는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면서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아버지의 여러 옛 친구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빈소를 찾은 친구분들은 영정사진을 오랫동안 지긋이 바라보고 착잡하게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아버지에게 인사했습니다. 친구분과 인사를 나누고 저는 아버지는 어렸을 적 어떤 사람이었냐고 친구분께 여쭤봤습니다. 친구분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시고 나서 '참 착한 애였지. 성실하고, 착했어 정말' 이라고 답해주셨습니다. 그 답변을 듣고나서 저는 '아버지가 원하던대로 주변에 기억되었구나' 라는 안도가 들었고, '아버지의 당부를 따라 남은 인생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전하지 못한 말
아버지, 40살에 저를 낳아주신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아버지가 나이가 너무 많아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어려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네요. 때로는 원망스런 마음에 아버지에게 좋지 않은 말도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저와 누나를 사랑과 책임감으로 끝까지 키워주셨고, 돈이 부족해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착한 사람,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으니까요. 저에게는 그런 사람이 멋있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했어도, 멋있다는 말을 못한 게 제게 남은 유일한 한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아버지와 간간히 추억을 쌓아 행복했습니다. 아버지 고향에 기차 타고 내려가서 손 꼭 붙잡고 돌아다닌 것도 좋았고, 학교에 눈이 많이 내린 날에 여자친구와 학교에 찾아가 아버지와 쌓인 눈을 같이 쓴 것도 따듯한 추억입니다. 가끔 주말에 학교에 찾아가 요리해서 같이 도란도란 밥 먹은 것도 좋았고요. 그때 눈을 쓸러 간 여자친구와는 말씀 드린 것처럼 결혼하여 제 인생의 동반자로 아버지랑 어머니처럼 행복하게 살 거에요. 누나와 함께 아버지 대신 어머니도 잘 돌봐드리고 여행 다니며 추억도 쌓겠습니다. 하늘에서 지켜 봐주세요.
아버지 이제 그곳에는 고통이 없겠죠. 더 이상 아픈 피부도 없고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그곳에서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당부의 말씀 꼭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멋있는 나의 아버지.